르 카뮈 탄생 110주년인 2023년을 맞아 새로운 장정과 번역으로 선보이는 ‘책세상 카뮈 전집 개정판’ 5권. 카뮈가 1936년에서 1938년 사이에 구상 및 집필했으나, 카뮈 사후 1971년에야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카뮈의 실질적인 데뷔작이자 《이방인》의 모태가 된 소설이다.
“행복은 하나의 오랜 요구, 때로는 우리 안에서 완수되는 요구일 뿐이다.”
<행복한 죽음>의 초반에 나오는 이 문장을 읽고 나는 한동안 ‘요구’라는 단어에 붙들려 있었다. 우리는 흔히 행복을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좋은 일이 생기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어느 정도의 돈과 시간이 주어지면 자연스럽게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다. 행복은 그렇게 운 좋게 도착하는 감정이거나 삶이 가끔 건네는 선물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카뮈는 행복을 ‘요구’라고 부른다. 요구한다는 것은 기다리는 일이 아니다. 원하는 것을 향해 손을 뻗고, 그것이 내 것이 될 때까지 삶에 끈질기게 청구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카뮈에게 행복은 주어지는 상태라기보다 스스로 선택하고 붙잡아야 하는 삶의 태도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메르소가 자그뢰스를 계획적으로 살해하고 그의 돈을 빼앗아 행복을 찾아 나선다는 이 소설의 출발은 다시 읽어도 불편하다. 그런데 그 불편함을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면, 이 소설이 단순히 살인이라는 사건의 옳고 그름만을 묻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그 사건을 극단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가져야 하는가.
메르소는 그렇게 믿는다. 돈이 있어야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시간이 있어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다고. 그래서 그에게 돈은 사치의 수단이라기보다 자기 시간을 되찾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이 생각은 끔찍한 범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동의할 수 없으면서도 이상하리만큼 낯설지 않다. 우리 역시 행복을 자꾸 미래의 조건문으로 만들어두기 때문이다. 돈이 조금 더 생기면, 일이 덜 바빠지면, 내가 원하는 곳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행복해지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행복은 언제나 지금보다 조금 뒤에 놓인다. 메르소가 저지른 일은 어쩌면 우리가 무심코 품고 사는 이 믿음, 즉 ‘행복하려면 먼저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을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유를 얻은 메르소가 ‘세상 앞의 집’에서 살아가며 비로소 삶을 감각하기 시작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눈물과 태양의 얼굴을 한 삶, 소금과 뜨거운 돌 속에 담긴 그 삶을 사랑하고 찬미하고 싶은 힘이 솟구쳐 올랐다”는 문장에서 오래 멈춰 있었다.
눈물과 태양.
나는 이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가 한 얼굴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우리는 흔히 눈물을 슬픔에, 태양을 기쁨에 놓고 삶 역시 행복한 순간과 불행한 순간으로 나누려 한다. 그런데 카뮈의 세계에서는 그 둘이 좀처럼 분리되지 않는다. 태양은 눈부시지만 동시에 살갗을 태우고, 바다는 아름답지만 소금기는 상처를 따갑게 만든다. 삶도 어쩌면 마찬가지인지 모른다. 기쁨과 고통이 차례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서로 뒤엉킨 채 하나의 얼굴로 우리 앞에 놓이는 것.
그렇다면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이 사라진 상태에 도달하는 일이 아니라, 눈물까지 포함된 삶 전체를 받아들이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행복한 죽음>의 행복이 단순한 쾌락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느꼈다. 행복은 불행의 반대편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불행과 고통까지 끌어안고도 여전히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힘에 가깝다. 눈물을 지운 뒤에야 태양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면서도 태양을 바라보는 것. 어쩌면 카뮈가 말하는 행복은 그런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소설이 자연적인 죽음과 의식적인 죽음이라는 두 부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도 새롭게 보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죽음의 두 가지 형태를 나눈 것처럼 느껴졌지만, 읽고 나서는 오히려 어떻게 죽을 것인가보다 어떻게 자기 삶을 의식할 것인가를 나누는 제목처럼 보였다.
사람은 누구나 결국 죽는다. 그 사실만 놓고 보면 죽음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몸은 늙고 병들고 언젠가는 소멸한다. 하지만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정말로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우리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대부분 죽지 않을 사람처럼 하루를 보낸다. 삶을 뒤로 미루고, 행복을 유예하고, 언젠가 더 좋은 조건이 갖춰지면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삶은 이미 상당 부분 지나가 있다.
메르소가 찾아가는 ‘의식적인 죽음’은 그래서 단순히 죽음을 의식하는 태도라기보다, 죽음을 통해 오히려 삶의 유한함을 끝까지 자각하는 상태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가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살인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파괴를 통과한다. 그렇기에 그의 삶을 그대로 긍정할 수는 없다. 다만 카뮈가 그 극단적인 인물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죽음을 외면한다고 해서 삶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오히려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바라볼 때, 지금 살아 있다는 감각은 더 선명해질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메르소가 병으로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마지막을 완전한 불행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결말이 오래 남았다. 이 소설에서 행복과 죽음은 끝내 서로의 반대말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가까워진다. 충분히 살아 있음을 느껴본 사람에게 죽음은 삶을 부정하는 사건이 아니라, 그 삶을 마감하는 마지막 경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 일부는 어쩌면 죽음 그 자체보다 충분히 살아보지 못한 채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직 사랑하지 못한 것, 아직 보지 못한 것, 계속 다음으로 미뤄둔 것들. 죽음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모든 것을 끝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끝없이 미뤄온 삶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행복한 죽음’이라는 제목도 조금 다르게 읽힌다. 행복하게 죽는다는 것은 죽음의 순간에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는 뜻이라기보다, 죽음이 찾아왔을 때 더 이상 삶을 뒤로 미뤄두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에 가까운 것 아닐까. 죽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 앞에 놓였던 삶의 밀도일 것이다.
책을 덮고 나니 처음의 문장이 다시 돌아왔다.
행복은 하나의 오랜 요구.
나는 그동안 행복을 너무 자주 미래형으로 말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건이 갖춰지면, 시간이 생기면, 조금 더 여유로워지면.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세다 보면 이상하게도 행복은 언제나 현재에서 밀려난다. 메르소의 방법은 분명 잘못되었지만, 그가 행복을 삶의 가장 절박한 문제로 받아들였다는 사실만큼은 오래 남는다.
그래서 이제는 행복을 기다리는 대신 삶에게 조금 더 집요하게 요구해보고 싶다. 완벽한 조건이 갖춰질 때까지 삶을 미뤄두지 않고, 눈물과 태양이 동시에 떠 있는 이 불완전한 순간 안에서 내가 살아 있음을 충분히 느껴보는 것. 언젠가 행복해지기 위해 오늘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시간 안에서 이미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끝까지 찾아내는 것.
어쩌면 <행복한 죽음>은 죽음을 잘 맞이하는 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죽음이 와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삶을 사랑하는 법에 관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