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실려 있는 일곱 편의 소설들은 1996년에 발표된 '줄광대'를 시작으로 1994년에 발표된 '불 머금은 항아리' 까지 대략 30여 년이라는 광범위한 시간에 걸쳐 있는 작품들이지만 '예술적 삶과 구원의 문제' 라는 동일한 주제를 갖고 있으며 그 구성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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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시간의 문 (이청준문학전집, 중단편소설 6)의 내용 요약
'2000년대 이전 한국소설' 책인 《시간의 문 (이청준문학전집, 중단편소설 6)》는...
줄 위에 선다는 건 어느 쪽 땅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줄광대>를 다시 읽으면서 나는 계속 이 단순한 사실에 마음이 갔다. 줄의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곳, 발을 조금만 잘못 디뎌도 떨어질 수 있는 허공 위에서 오직 자기 몸의 균형만으로 버티는 사람. 허노인과 그의 아들 운은 어쩌면 평생 그런 자리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남들이 단단한 땅 위에서 삶을 꾸려가는 동안, 그들은 땅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허노인이 아들과 함께 줄에 오른 마지막 장면이 이상할 만큼 오래 남았다. 자기 기예를 거의 완전히 익힌 아들과 나란히 줄 위에 선 그날, 떨어져 죽는 사람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다. 아들이 마침내 아버지의 경지에 닿았다는 사실과 아버지의 죽음이 한 장면 안에서 겹쳐진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무언가를 물려준다는 일이 단순히 남기는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몸에 밴 감각과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건넨다는 건, 그 사람이 자신 없이도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아들이 혼자 줄 위에 설 수 있게 되는 순간 아버지는 그 곁에서 사라진다. 기예는 이어지지만 그것을 지니고 있던 한 사람의 몸은 사라진다. <줄광대>에서 전승이 유난히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래서였다. 남겨진다는 것과 사라진다는 것이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순간에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줄 위에 남은 운 역시 끝까지 그곳에서 살아가지는 못한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난 뒤 그는 이전처럼 줄을 탈 수 없게 된다. 처음에는 이것을 사랑과 예술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이야기처럼 읽었는데, 다시 읽으니 조금 다르게 보였다. 사랑은 운에게 선택지라기보다 무게에 가까웠다.
줄광대의 몸은 가벼워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아야 하고, 무엇에도 지나치게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런데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사람에게는 갑자기 돌아가고 싶은 곳이 생긴다. 기다리고 싶은 사람이 생기고,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 생긴다. 아무 데에도 속하지 않은 채 허공을 건너던 사람에게 비로소 한쪽 방향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운을 줄에서 떨어뜨린 것이 아니라 땅으로 불러내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줄 위의 삶을 버리고 다른 삶을 택했다기보다,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무게로 줄 위에 설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결국 이 세계의 어딘가에 마음을 묶어두는 일이고, 그렇게 땅과 연결된 사람에게 허공 위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그것을 실패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운은 예술을 잃고 평범한 인간으로 추락한 것이 아니라, 줄 위에서만 가능했던 삶에서 땅 위에서 가능한 다른 삶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다만 문제는 그가 한때 줄 위에서 누구보다 완전했던 사람이었다는 데 있다. 한 번 그 높이를 알아버린 사람에게 땅 위의 삶은 아무리 평온해도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가 ‘승천한 줄광대’로 불리는 장면이 더욱 묘하게 다가왔다. 승천이라는 말은 본래 위로 올라가는 움직임을 뜻한다. 구원이나 초월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동시에 죽음의 이름이기도 하다. 줄에서 내려와 한동안 땅 위의 삶을 살았던 운이 마지막에는 다시 위쪽의 이미지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이 소설이 예술적 완성과 죽음을 묘하게 포개놓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줄광대에게 줄 위는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다. 자신의 몸과 감각이 가장 완전하게 살아나는 자리이며,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다. 그렇다면 그 줄을 끝까지 타고 간다는 것은 어쩌면 일상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과 양립하기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운이 ‘승천했다’는 표현에는 그래서 아름다움과 섬뜩함이 동시에 있었다. 줄광대로서는 마침내 가장 완전한 모습으로 남았지만, 그 완성은 삶의 끝과 맞닿아 있었다.
이 작품이 예술적 삶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을 때, 처음에는 왜 하필 이런 결말을 구원이라 부를 수 있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구원이라면 보통 위태로운 곳에서 벗어나 안전한 곳에 도착하는 일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노인과 운에게는 오히려 그 반대였던 것 같다. 그들에게 땅은 안전한 곳이었지만 반드시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떨어질 위험을 감수하며 줄 위에 섰을 때 그들은 가장 자기다운 모습에 가까워졌다.
그래서 <줄광대>를 읽고 나면 안정과 완성이 반드시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삶을 좋은 삶이라고 믿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흔들림을 견디는 일이야말로 자신을 잃지 않는 방식일 수도 있다. 허노인과 운에게 줄은 위험해서 벗어나야 할 장소가 아니라, 위험하기 때문에 오히려 끝까지 붙들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결국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은 줄타기라는 기술 하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디에서 살아야 가장 자기 자신일 수 있는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의 ‘승천’을 단순한 죽음으로도, 아름다운 구원으로도 어느 한쪽으로만 읽기가 어렵다. 그가 끝내 삶에서 사라진 순간과 줄광대로서 완성된 순간이 겹쳐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줄광대>가 보여주는 예술가의 삶은 바로 그 모순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땅에 내려오면 살 수 있지만 자신을 잃고, 줄 위에 남으면 자신을 지킬 수 있지만 끝내 추락할 수도 있는 삶. 허노인과 운은 그 두 세계 사이의 가느다란 선을 걸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선 위에서 끝까지 균형을 잡으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소설이 말하는 예술가의 가장 쓸쓸한 구원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