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는 단어들』은 저자가 세계 40여 개국을 여행하면서 느낀 생각과 일상을 철학적 사색을 통해 담아낸 철학 에세이다. 삶이 문득 그리워질 때 저자는 여행을 떠났다. 인도, 티베트, 페루, 아르헨티나, 브라질, 스페인, 이집트, 스위스, 그리스, 프랑스, 영국, 중국, 일본 등을 돌아다니며, 낯선 사람들과...
[독서 후 코멘트]
“철학 책도 시집도 아니다.” 혼돈과 자기 모순을 숨기지 않는 책
저자는 "이것은 철학 책도 시집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름을 얻지 못한, 얻지 못할 어떤 것일 뿐"이라고 선언한다. 자신의 사색과 철학도 규정할 수 없고 끝이 없다고 말한다. 물론 형식을 따지면 저자가 세계 40여 개국을 여행하면서 느낀 생각과 일상을 사색으로 담아낸 에세이다. 물론 저자가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하지 않았듯이, 책엔 단편 우화와 시가 섞였다.
서문의 선언도 도발적이다. 질서의 선로에서 탈선해 부유하는 단어들이 혼돈스럽다면 쓰레기통에 던져버려도 좋고, 그 방향 없는 떠돎이 반갑다면 자기의 눈을 찌르는 송곳으로 사용해도 좋다고 말한다. 책을 버리든가, 찔리든가. 독자는 저자의 친절함(?) 덕분에 책에 혼돈이 넘쳐난다는 것을 숙지하며 텍스트에 들어간다.
그 혼돈 속에 저자의 자기모순도 있고 그 역시 애써 숨기려 하지 않았다. 저자는 비평가를 작가와 작품을 죽이는 또 다른 독자로 단정한다. 하지만 책은 타인의 텍스트들에 대한 비평으로 넘친다. 더구나 저자의 생업은 논술 출제 평가위원과 국어 강사였다. 해석을 가르치고 채점하는 일로 넘치는 직업이다. 제도 한복판에 선 사람이 해석의 권력을 고발하는 것이 위선으로 비친다.
[발췌한 책 속 문장]
5P 질서의 선로에서 탈선해 부유하는 단어들은 자신의 문장 안에서도 혼돈스럽게 부유하고 있다.
=> 질서의 선로를 당당히 이탈했다 밝히는 저자
11P 길 없는 곳에서 길은 길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21P 나의 몸은 타자들의 여백이거나 바깥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의 몸은 그 여백이나 바깥의 중심에 존재한다.
=> 모든 인간이 서로에게 주변이면서 각자에게 중심이다.
22P 사람들은 몸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몸이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노동을 보고 그것을 통해 ‘타인의 몸’을 재구성하여 인식한다.
=> 타인의 직업과 배경을 보는 순간, 그/그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건 부지기수다.
24P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타인도 타인이 아니라 ‘타인의 노동’이다.
=> 타인의 노동이 인간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숭배받고 있는 것이 현실.
27P 하지만 노동의 방향이 타자가 아닌 ‘나’에게 전환되는 순간, ‘나’를 노동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나의 몸은 노동의 타자가 되고 나에게 ‘인식되는 몸’으로서의 대상이 된다.
=>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노동의 본체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라 말하는 걸까
28P 밤이 새벽으로 기어들기 전에 그가 먼저 별들을 끌어내려 호주머니에 구겨넣었다.
=> 밤이 걷히는 모습을 아름답게 묘사한 문장.
33P 즉, 욕망으로 타자를 지배하는 순간 사랑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 소유하려는 순간, 사랑의 대상은 사물이 되고 사물은 사랑의 상대가 될 수 없다.
34P 그래서 사랑은 사막 위의 고독한 장미처럼 자신도 모르는 가시, 다른 것들이 접근할 수 없는 무서운 독을 동시에 품는 행위이다.
=> 사랑이 때로는 파괴와 죽음을 유발할 수 있다.
41P 그 거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많은 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샘물이 필요했을까? 그가 소유한 바닷물은 휘몰아치는 파도를 만들고 배를 파괴하는 남성적 힘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
=> 바닷물은 지구의 70%를 차지하는 방대한 양을 자랑하지만, 갈증을 유발하는 물이다. 그러기에 생명을 살리는 샘물을 갈구하는 것이 아닐까.
58P 샤자한이 아내를 사랑한 마음, 그의 가장 본질적 자아는 그의 주검 속이나 그의 영혼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 상관없어 보이는 그의 바깥, 그의 마음을 닮고자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과 나의 발걸음 속에 있을 뿐이다.
=> 샤자한의 사랑은 타지마할을 방문하는 관광객을 통해 의미가 빛난다.
64P 이렇게 지식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인간은 지식의 타자 혹은 희미한 주체로 전락하게 된다. 지식의 범주 안에서 감각을 선택하고 활용하는 약한 존재인 셈이다.
72P “나의 추억이란 인과의 고리가 끊어진 파편화된 과거의 시간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현재화하고 재구성하는 것은 자네에게서 시작되는 것이지. 그러니까, 나의 추억은 자네 것이야.”
=> 추억은 공유될 수 있어야 의미가 있다는 발언
73P 즉, 추억은 과거에 존재할 수 없으며 오로지 현재의 단어와 타자의 만남이 존재하는 ‘지금, 이곳에서’만 일시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 추억은 현재에서 말과 타자를 배우로 쓰는 공연이다.
86P 나의 존재 근거로서 ‘타자’가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타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 역시 존재해야 한다.
102P 독자들에게 작가의 작품은 없다. 가장 크거나 아름답게 보이는 새와 꽃만 그들의 감각 속에 존재할 뿐이다. 특히 우리가 고전 작품이라 일컫는 것들에 담긴 형상들은 분명하게 구별 가능한 새와 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알 수 없는 기호의 덩어리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향기로운 것들에만 코를 들이대던 독자들에게는 그 기호들의 냄새가 낯설고 역겨울 뿐이다.
=> 위대한 고전이란 겉면만을 보고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겉핥기 독자들은 비꼬는 문장. 나도 그 이유로 여러 된 통이 당했기 때문에 뜨끔하기도 하고, 긁히기도 한다.
103P 비평가 역시 작가와 작품을 죽이는 또 다른 독자이다. 비평가들이 작가와 작품에 휘둘렀던 분석의 절대적 권력은 오히려 작가와 그의 작품과는 무관한 비평가 자신의 철학과 지식의 향연일 뿐이다.
=> 비평가에 대해 날이 설 대로 선 작가의 가치관이 드러난다.
104P 비평가의 비평은 작가와 작품 그리고 독자를 연결하는 다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결코 이 다리를 원치 않는다. 그 다리는 독자와 작품의 거리를 더 멀게 만드는 장애물이다.
=> 연결성이 짙은 성격의 ‘다리’를 ‘배제성’을 덮어씌우는 작가의 아이러니함.
111P 하지만 그녀의 뒤, 등은 이미 너무도 많은 말을 내게 건네고 있었다.
114P 이렇게 나의 뒷모습은 나의 주인이지만 나의 것은 결코 아니다. 타자에 의해 고스란히 해석당할 수밖에 없는 타자의 것이다.
=> 나의 가장 나다운 부분이 나의 시야 밖에 있다. 인간은 구조적으로 타자를 필요로 한다.
127P 하지만 눈빛으로 전달된 나의 앎은 타자에 의해 변화될 수 있으며 그것은 결코 내가 보내고자 했던 것과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
174P 정말 눈물은 나약함의 상징일까? 그것은 결코 아니다. 곧게만 자란 나무, 그래서 부드러움이 전혀 없는 나무들에게는 물기의 촉촉함이 필요하다. 그 나무가 약간의 물기조차 갖지 못한다면 쉽게 부러지고 말 것이다.
=> 울음은 억제되어선 안 된다. 울 수 있을 때 울게 하는 것도 사회의 관용이다.
178P 나의 울음소리는 어떤 음악적 리듬보다도 상대방을 부드럽고 감정적인 존재로 만들 수 있다. 웃음이 공허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에 반해 울음은 그 공허함을 깨는 투명한 진실이다.
179P 눈물은 뜨겁고 강한 생명의 붉은 핏줄이다.
227P 인간은 지구처럼 자신의 몸집을 팽창시키기 위해 주변의 것들을 모두 독식하려 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중력, 즉 권력과 경제력이 무한히 팽창되고 있다.
=> 타임머신을 타고 온 미래인이 없는 것도 인간의 욕심으로 후대의 지구가 멸망해서이지 않을까.
245P 붉은 장미가 붉은 장미의 아름다움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튤립, 백합, 그리고 그들의 색깔과 경쟁하는 잡초들이 서로에게 창끝을 겨누어야만 한다.
=> 아름다운 존재도 더불어 살기 때문에 장점을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