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마흔네 살이란 젊은 나이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저항의 아이콘 알베르 카뮈의 여행과 추억, 사랑의 에세이가 담긴 『안과 겉‧결혼‧여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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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 겉·결혼·여름 내용 요약
알베르 카뮈의 안과 겉·결혼·여름은 그의 초기 에세이집 안과 겉 (1937), 결혼 (1938), 여름 (1954)을 한 권으로 묶은 작품으로, 부조리 철학의 씨앗과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서정적 성찰을 담고 있다. 📖 이 책은 카뮈가 알제리와 유럽을 오가며 경험한 자연, 인간, 그리고 존재의 모순을 시적이고 철학적인 문체로 풀어낸다. 20대 청년 카뮈의 감수성과 40대에 접어든 그의 성숙한 시선이 어우러져, 삶의 빛과 어둠, 기쁨과 덧없음을 동시에 포착한다. 🌞
<안과 겉.결혼.여름>을 읽는 동안 나는 계속 카뮈가 말하는 ‘결혼’이 대체 무엇과 무엇의 결합을 뜻하는지 생각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혼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과 세계 사이의 결합에 가까웠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생각하는 정신과 살아 있는 육체, 몸과 태양, 피부와 바다, 그리고 언젠가 사라질 나와 내가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을 세계 사이의 결합이었다.
“생명이 내 몸에 차오르니, 나는 벌써 금빛으로 익은 이 세계의 과일을 깨물며, 그 달고도 강렬한 과즙이 내 입술을 따라 흘러내리는 느낌에 격한 감동을 맛보았다.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도, 이 세계도 아니고 다만 세계로부터 나에게로 사랑이 태어나게 하는 일치와 침묵이었다.”
나는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사랑의 주어와 목적어가 동시에 사라지는 기묘한 순간을 느낀다. 사랑하는 ‘나’도 없고, 사랑받는 대상으로서의 ‘세계’도 없다. 남는 것은 그 둘이 서로 맞닿는 순간, 그 사이에서 갑자기 생겨나는 어떤 감각뿐이다. 우리는 사랑을 흔히 누군가의 소유물처럼 말한다. 내 사랑, 내가 느끼는 감정,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런데 카뮈의 문장 속에서는 사랑조차 누구의 것이 아니다. 사랑은 소유하는 감정이 아니라 나와 세계가 잠시 정확히 맞물릴 때 발생하는 하나의 사건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결혼>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태양과 바다와 돌과 육체가 중요하게 느껴졌다. 카뮈에게 세계는 해석해야 할 대상이기 전에 몸으로 닿는 것이었다. 햇빛은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그저 피부를 뜨겁게 만들고, 바다는 삶의 이유를 알려주지 않은 채 몸을 감싼다. 세계는 인간에게 어떤 대답도 주지 않지만, 바로 그 침묵 속에서 이상할 만큼 충만해진다. 카뮈가 사랑한 것은 세계가 자신에게 의미를 주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 의미도 약속하지 않으면서도 이렇게 눈부시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이 감각을 생각하다 보면 <안과 겉>이라는 제목도 새롭게 보였다. 안과 겉은 서로 갈라진 두 세계라기보다 하나의 삶이 가진 두 얼굴에 가까웠다. 빛이 있다는 것은 동시에 그늘이 있다는 뜻이고, 삶을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끝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카뮈의 글에서는 밝음과 어둠, 행복과 절망, 생과 죽음이 이상할 정도로 가까이 붙어 있다. 어느 하나를 지워야 다른 하나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쪽을 끝까지 바라볼 때 다른 쪽도 선명해진다.
“포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거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내가 이 세상의 모든 ‘훗날에’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것은 나의 눈앞에 있는 현재의 풍요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이 문장이 역설처럼 느껴졌다. 미래를 거부하는 것이 어떻게 삶을 긍정하는 일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오래 읽고 있으면 이 거부는 체념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에 대한 집착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지금을 미래를 위한 재료로 사용하는 일에 너무 익숙하다. 오늘의 시간을 내일을 위해 쓰고, 지금의 즐거움을 조금 참으면 언젠가 더 큰 행복이 올 거라고 믿는다. 그렇게 현재는 늘 다음을 위한 대기실이 된다.
하지만 카뮈는 그 ‘나중’을 의심한다. 미래의 행복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위해 이미 도착해 있는 것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서다. 눈앞의 햇빛과 바다, 피부를 스치는 바람과 과일의 단맛은 나중에 다시 꺼내 쓸 수 없다. 그 순간을 흘려보낸 뒤에는 같은 태양 아래 다시 서더라도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를 유예한다는 것은 어쩌면 삶의 일부를 영영 사용하지 않은 채 버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행복은 낙관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여야 한다고 운명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니까. 행복은 사랑과 이어져 있다.”
나는 이 구분이 <결혼>과 <여름>을 관통하는 중요한 문장처럼 느껴졌다. 낙관주의는 결국 미래에 관한 판단이다. 앞으로 괜찮아질 것이라는 전망이고,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러나 사랑은 반드시 미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랑은 예측이라기보다 지금 눈앞에 존재하는 것에 몸을 기울이는 일이다.
그러니 카뮈에게 행복하다는 것은 앞으로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믿는 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미래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데도 지금 존재하는 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가까웠다. 내일이 지금보다 나쁠 수도 있고, 사랑하는 것이 언젠가는 사라질 수도 있으며, 결국 모든 것은 끝난다. 그런데도 오늘의 빛을 빛이라고 말하는 것. 나는 그것이 카뮈가 말하는 행복의 가장 단단한 형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여름>의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은 없다”는 문장은 앞선 모든 감각을 마지막으로 뒤집어 완성한다.
처음에는 절망과 사랑이 서로 반대편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희망을 품고, 삶에 절망한 사람은 삶으로부터 멀어진다고. 하지만 카뮈에게 두 감정은 오히려 같은 곳에서 태어난다. 삶이 유한하다는 것, 사랑하는 것이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것, 지금의 이 순간이 두 번 다시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말로 아는 사람에게만 현재는 절박해진다.
그렇다면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절망을 극복했다는 뜻이 아니라, 절망을 끝까지 바라보고도 삶 쪽에 남기로 했다는 뜻일 것이다. 죽음을 모르는 사랑보다 죽음을 아는 사랑이 더 뜨겁고, 영원하다고 믿는 순간보다 사라질 것을 아는 순간이 더 선명해진다. 카뮈에게 절망은 사랑을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밀도를 높이는 조건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안과 겉.결혼.여름>을 읽으면서 결국 사랑이라는 것이 시간과 맺는 관계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사랑을 흔히 미래형으로 배운다. 오래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 다음 계절을 함께 보내겠다는 약속, 앞으로도 계속 곁에 있겠다는 다짐. 그래서 때로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견디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카뮈의 사랑에는 이상할 만큼 ‘다음’이 희미하다. 영원을 약속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 온몸으로 세계에 닿는 일이 먼저다. 다음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이 전부가 된다.
나는 이 책들을 읽으며 내가 얼마나 많은 순간을 ‘나중’을 위해 남겨두고 사는지도 생각했다. 좋은 것이 생기면 더 좋은 때를 기다리고, 마음에 드는 것은 아껴두고, 기쁨조차 전부 써버리지 않으려 한다. 지금 느낄 수 있는 것을 조금 남겨두면 언젠가 더 제대로 누릴 수 있을 것처럼.
그런데 정말 그런 ‘나중’이 오는 걸까.
어쩌면 아껴둔 감각은 결국 아무에게도 쓰이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나간 계절을 다시 불러올 수 없듯, 그때 느끼지 않은 기쁨을 나중에 대신 느낄 수도 없다. 삶은 저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카뮈가 말하는 ‘결혼’은 결국 세계가 나를 사랑해줄 것이라고 믿는 일이 아니라,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는 세계를 먼저 사랑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언젠가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여기의 태양 아래 서 있는 것. 끝이 있다는 이유로 마음을 아끼는 대신, 끝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깊이 몸을 던지는 것.
어쩌면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영원을 원하는 일이 아니라, 영원이 없다는 사실과 화해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화해가 이루어진 아주 짧은 순간, 안과 겉도, 행복과 절망도, 나와 세계도 잠시 경계를 잃는다. 남는 것은 그저 햇빛과 피부, 바다와 몸, 그리고 지금 살아 있다는 감각뿐이다.
이 책이 내게 남긴 가장 단순하고도 어려운 숙제는 아마 그것이었다.
아껴두지 않고 살아보는 것.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훗날’보다 이미 와 있는 오늘에 조금 더 많은 몸을 내어주는 것.
안과 겉·결혼·여름은 예전부터 좋아했던 산문집인데, 그중에서도 결혼 부분을 유독 좋아한다. 다시 펼칠 때마다 오래 붙잡게 되는 문장이 있다. 생명이 내 몸에 차오르니, 나는 벌써 금빛으로 익은 이 세계의 과일을 깨물며, 그 달고도 강렬한 과즙이 내 입술을 따라 흘러내리는 느낌에 격한 감동을 맛보았다.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도, 이 세계도 아니고 다만 세계로부터 나에게로 사랑이 태어나게 하는 일치와 침묵이었다.
나 자신도 이 세계도 아니라는 그 부정이 오래 마음에 걸렸다. 우리는 사랑을 말할 때 늘 주어를 필요로 한다. 내가 사랑한다, 혹은 저것이 나를 사랑하게 만든다. 근데 카뮈는 이 문장에서 그 두 주어를 다 지워버린다. 사랑의 주인이 나도 아니고 세계도 아니라면, 사랑은 대체 누구의 것인가. 나는 이 질문 앞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늘 소유의 언어로만 배워왔다는 걸 깨달았다. 내 사랑, 내가 느끼는 감정, 나를 향한 마음. 근데 카뮈가 말하는 사랑은 소유격이 붙을 자리가 없다. 그건 나와 세계 둘 다에게 속하지 않고, 오직 그 둘이 만나는 접촉의 순간에만 잠깐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무엇이었다.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건 무언가를 붙잡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 접촉이 일어나도록 나라는 경계를 잠깐 열어두는 일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은 없다는 문장이 참 좋았는데, 나는 이걸 앞서 읽은 사랑의 정의와 나란히 놓고 생각했다. 침묵으로 완성되는 사랑, 지금이 아니면 성립하지 않는 사랑. 여기에 절망이라는 조건이 하나 더 붙는다. 언뜻 보면 절망과 사랑은 정반대의 감정 같다. 하나는 무너지는 마음이고 하나는 채워지는 마음이니까. 근데 카뮈는 그 둘을 서로의 전제로 만든다. 절망을 통과하지 않은 사랑은 아직 사랑이 아니라는 것.
이 문장을 다시 뜯어보면, 절망과 사랑이 나란히 서 있는 게 아니라 절망 없이는 사랑이 없다는 구조로 되어 있다. 없이는 없다는 이 이중 부정이 자꾸 눈에 밟혔다. 카뮈는 절망을 사랑의 반대편에 놓지 않고, 사랑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 자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절망이 지나가고 그다음에 사랑이 오는 게 아니라, 절망이라는 바탕이 없으면 애초에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가 자라날 토양이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여기서 삶이라는 단어가 사랑 앞에 함께 놓인 것도 다시 봤다. 카뮈는 그냥 절망 없이는 사랑이 없다고 하지 않고, 삶에 대한 절망, 삶에 대한 사랑이라고 썼다. 그러니 이건 어떤 개별 대상을 향한 감정이 아니라, 삶 자체를 통째로 끌어안는 태도를 말하고 있었다. 삶이 언젠가 끝난다는 걸, 이 모든 게 영원하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받아들인 사람만이 지금 이 삶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절망이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조건이라면, 우리가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아직 그것을 완전히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책을 순서대로 읽으면, 결혼에서 시작해 여름에서 완성되는 하나의 흐름이 보인다. 결혼에서 사랑은 나도 세계도 아닌 그 접촉의 순간에만 존재하는 사건이었고, 그 사건은 지금이 아니면 성립하지 않기에 훗날을 거부하는 태도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침묵으로 완성되던 사랑이, 여름에 이르러서는 절망이라는 조건을 만나 비로소 완전해진다.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사랑이 왜 그렇게 절박한지, 여름은 그 이유를 알려준다. 삶이 유한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절망을 먼저 통과했기 때문에, 지금 이 접촉이 그토록 무거워지는 것이다.
나는 이 흐름을 읽으면서, 내가 그동안 사랑이라는 감정을 얼마나 안전한 방식으로만 이해해왔는지 돌아보게 됐다. 사랑을 시작할 때 우리는 보통 미래를 함께 그리는 일부터 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얼마나 오래갈지를 먼저 상상한다. 근데 카뮈의 사랑에는 그 미래가 아예 없다. 오직 지금, 그리고 그 지금이 절망 위에 서 있다는 자각뿐이다. 처음엔 이게 너무 허무한 사랑처럼 보였다. 미래도 없고 약속도 없는 사랑이라니. 근데 다시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게 더 정직한 사랑의 형태였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미래를 약속할 때, 사실 우리는 그 약속이 지켜질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근데 카뮈는 그 불확실한 약속 대신, 지금 이 순간이 전부라는 걸 먼저 인정하고 시작한다. 그러니 그가 말하는 사랑은 나중을 담보로 지금을 견디는 감정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자체를 완전히 살아내는 감정이었다.
이 책을 덮으면서 나는 사랑한다는 것과 산다는 것이 카뮈에게는 결국 같은 의미였다는 걸 깨달았다. 삶을 사랑한다는 건 삶이 끝난다는 사실을 미리 슬퍼하는 게 아니라, 그 끝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의 태양과 바다와 침묵에 몸을 던지는 일이었다. 나는 살면서 많은 것들을 영원할 것처럼 대해왔다. 지금의 관계도, 지금의 계절도, 지금의 시간도. 근데 그 모든 게 언젠가 끝난다는 걸 정말로 받아들이고 나면,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망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통과한 자리에서만, 진짜 사랑이, 그리고 진짜 삶이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지금 이 순간이라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넘버가 떠올랐다. 오랫동안 억눌리고 좌절했던 주인공이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걸 손에 넣기 직전, 폭발하듯 터뜨리는 노래다. 그 곡이 그렇게까지 벅차게 들리는 이유는, 그게 아무 배경 없이 튀어나온 낙관이 아니라 오래 참고 견뎌온 절망의 시간을 다 지나온 뒤에야 겨우 도달한 외침이기 때문이다. 카뮈가 결혼과 여름에서 계속 말하려던 것도 아마 이 지점이었을 거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절망을 모른 채로는 결코 그렇게 벅찬 무게를 가질 수 없다는 것. 노래 속 지킬이 그 순간을 맞이하는 게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싸움의 시작인 것처럼, 카뮈에게도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는 일은 절망이 끝난 자리가 아니라 절망을 짊어진 채로 걸어 들어가는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나는 카뮈에게서 삶을 사랑하는 태도를 배우고 싶어졌다. 그건 앞날이 밝을 거라 믿는 낙관도 아니고, 지금 힘드니 나중에 보상받을 거라는 위안도 아니었다. 그저 이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 본 채로, 그럼에도 지금 이 태양과 바람과 사람 앞에 기꺼이 몸을 던지는 태도였다. 살아있다는 것의 무게를 회피하지 않는 사람만이 살아있다는 것의 기쁨도 온전히 가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삶을 사랑한다는 건 그 삶이 언젠가 나를 떠나리라는 걸 이미 알고도, 매일 아침 다시 그 앞에 마중 나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카뮈 하면 그동안 이방인의 그 건조한 뫼르소나 시지프 신화의 냉정한 논리만 떠올랐었는데, 안과 겉·결혼·여름을 읽고 나니 카뮈한테 이런 면도 있었구나 싶었다. 이방인 읽을 때는 뭔가 텁텁하고 메마른 느낌이었다면, 이 책은 읽는 내내 지중해 바다랑 뜨거운 여름 냄새가 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그중에서도 '결혼'이랑 '여름' 부분이 제일 좋았다. 찾아보니 이 글들, 카뮈가 개인적으로 꽤 힘들었던 시기에 쓴 거였다. 교수 자격 시험에서 떨어지고 결혼 생활도 흔들리던 때였는데, 그때 혼자 지중해로 여행을 떠났고 거기서 쓴 글들이라고 한다. 이걸 알고 나니까 문장들이 좀 다르게 읽혔다. 삶이 제일 초라하게 느껴질 때 오히려 태양이랑 바다 앞에 자기 자신을 그냥 던져버리면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는 게, 이방인이나 시지프 신화에서 계속 말하던 부조리에 대한 나름의 답처럼 느껴졌다.
'티파사에서의 결혼' 읽을 때는 진짜 그 폐허 위에 내가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너진 신전이랑 돌기둥 사이를 걸으면서 자연이랑 하나가 되는 순간을 묘사하는데, 거기엔 무슨 논리나 사유보다 몸으로 느끼는 감각이 먼저였다. 태양 아래 살갗으로 파고드는 열기, 바다 냄새, 꽃향기, 이런 것들로 삶을 그냥 살아버리는 거다. 이해하려 들지 않고. 이 부분 읽다가 이방인의 뫼르소가 떠올랐다. 엄마 장례식 다음 날 마리랑 바다에서 수영했는데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게 감정이 없어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결혼을 읽고 나니까 그게 무감각이 아니라 오히려 카뮈식으로는 제일 정직한 태도였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슬픔이라는 형식보다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태양이랑 물이 더 진짜라는 것.
'알제의 여름'은 젊음이랑 몸에 대한 예찬 같은 게 두드러졌다. 알제 청년들이 여름 바다에서 뛰어놀고 태양 아래 몸 태우는 걸 묘사하는데, 그 순간 자체가 의미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 부분 읽으면서 문득 내 여름들이 생각났다. 딱히 이유도 없이 그냥 바다에 몸 담그고, 뜨거운 볕 아래 누워만 있던 순간들. 그땐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지나고 보면 그게 오히려 제일 살아있다고 느꼈던 시간이었다. 카뮈가 하려던 말이 이런 거였구나 싶었다. 삶의 의미라는 게 뭐 거창한 데서 오는 게 아니라, 몸이 태양이랑 바람이랑 물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 찰나에 있다는 것.
책을 덮고 나서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요즘 나는 뭔가 의미 있는 걸 해야 한다는 압박에 계속 짓눌려 있었던 것 같다. 시간 헛되이 보내면 안 된다는 강박, 매 순간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조바심 같은 거. 그런데 카뮈는 제일 힘들고 좌절했던 시기에 오히려 아무 목적도 없이 바다에 몸을 던지고 태양 아래 누워있는 것만으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한다. 거창한 답을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그냥 지금 이 순간의 감각에 나를 맡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걸 보여준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요즘 지치고 공허할 때 애써 답을 찾으려 하기보다 그냥 밖에 나가서 걷거나 볕 좀 쬐는 게 나은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질수록 오히려 몸으로 느끼는 사소한 것들에 좀 기대도 괜찮다는 걸, 카뮈의 이 책이 조용히 알려준 기분이었다.